들어가며
2026년 6월 5일, 유튜브·팟캐스트 시사방송 '최욱의 매불쇼'에서 진행자 최욱 씨가 던진 한 문장이 며칠째 정치권과 온라인을 흔들고 있다. 발언 자체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단어—'탱크'와 '전두환', 그리고 '박멸'—은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봉인해 둔 기억의 뇌관을 정확히 건드렸다.
이 글은 그 발언을 옹호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 발언이 왜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더 근본적인 질문—'관용은 어디까지 관용해야 하는가', '말은 행위와 얼마나 가까운가', '나는 내 편의 말에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가'—을 차분히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먼저 사실관계를 정확히 짚고, 그 위에 생각을 쌓겠다.



1. 무엇이 있었나 — 사실관계
발언이 나온 것은 6·3 지방선거 직후, 선거 결과를 분석하던 방송에서였다. 해당 회차의 제목은 '오세훈을 선택한 이유? 극우는 몽둥이가 약'이었고, 황희두 노무현재단 이사와 정준희 한양대 에리카 겸임교수 등이 함께 출연했다.
최욱 씨는 이른바 '일베'로 대표되는 온라인 극우 커뮤니티 현상을 다루면서, 이를 "박멸 투 트랙으로 가야 한다", "확실히 범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제도에서 이런 것들을 계속 놔두니까 재미가 되고 문화가 된다", "이놈들이 아주 동경하는 게 전두환"이라는 맥락에 이어, "그 식으로 온라인상에 탱크로 밀어버려야 돼"라고 발언했다. 발언 직후 그는 "그 범죄에 대해서만큼은"이라며 대상을 한정했다.
여기서 사실 관계상 두 가지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 발언의 표적은 '특정 온라인 범죄 행위'로 한정되었다. 보도들은 그가 "그 범죄에 대해서만큼은"이라는 단서를 단 것을 일관되게 전한다. 둘째,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전두환식 탱크'라는 비유 자체가 1980년 5월의 발포와 진압을 환기하기에, 5·18 연상 논란으로 번진 것이다.
같은 방송에서 정준희 교수가 일부 극우화된 집단을 겨냥해 "(합법적) 몽둥이가 필요하다", "권력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도 함께 도마에 올랐다. 다만 이 발언 역시 '모든 2030 세대'가 아니라 특정 집단을 상정한 것이라는 맥락 분석이 일부 매체에서 제기됐다.
정치권의 반응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6일과 7일 SNS를 통해, 스타벅스의 '5·18 탱크 데이' 표현에 강경 대응했던 이재명 대통령이라면 이번 발언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탱크'라는 단어에 대한 감수성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도 7일 비판에 가세하며,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 '박멸해야 한다'는 표현을 망언으로 규정하고 같은 일관성 문제를 제기했다.
최욱 씨 본인은 8일 방송에서 직접 입장을 밝힐 것으로 예고되었다. 다만 이 글을 쓰는 시점(6월 8일)까지, 해당 발언에 대한 그의 공식 입장이나 사과가 보도로 확정 확인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발언 당사자의 해명을 반영하지 못한 채 쓰였다는 한계를 먼저 밝혀 둔다.



2. 핵심은 '내용'이 아니라 '일관성'이다
이 논란이 단순한 말실수 시비를 넘어서는 이유는, 비판의 칼끝이 발언 자체보다 '잣대의 비대칭'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스타벅스의 한 프로모션 표현이 5·18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거센 비판과 불매 움직임, 책임자 사과로까지 이어진 일이 있었다. 그 사안에서 '탱크'라는 단어는 그것을 쓴 의도와 무관하게, 단어가 환기하는 역사적 무게만으로 제재의 대상이 되었다. '맥락보다 단어가 주는 상처가 먼저'라는 기준이 그때 작동한 셈이다.
그렇다면 같은 기준을 이번 발언에도 적용해야 하는가? 이것이 비판자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논리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만약 '탱크'라는 표현이 의도와 무관하게 문제였다면, 친여 성향 방송에서 나온 '전두환식 탱크' 비유는 더더욱 문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 담론의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교정하기 어려운 결함과 마주한다. 잣대의 진영화다. 같은 행위가 '우리 편'에서 나오면 맥락과 선의를 따지고, '상대 편'에서 나오면 단어와 결과만 따진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집단의 도덕적 위반에 관대하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면허(moral licensing)'와 '내집단 편향'은 이 비대칭을 설명한다. 우리가 좋은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을수록, 그 과정에서의 거친 언어는 정당한 분노로 재해석된다.
신뢰할 만한 공적 담론의 최소 조건은 화려한 논리가 아니라 대칭성이다. 한 발언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늠하는 가장 정직한 시험은 이것이다. "정확히 같은 문장을, 정확히 반대 진영의 사람이 정확히 반대 대상을 향해 말했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만약 그 답이 달라진다면, 평가의 기준은 발언이 아니라 화자의 소속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좌우 어느 쪽에게도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중요하다.



3. 관용의 역설 — 발언의 '내용'을 변호할 수 있는 자리
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발언을 옹호하는 쪽의 논리도 진지하게 들어 볼 가치가 있다.
최욱 씨의 발언은 표면의 거친 비유를 걷어내면, 사실 오래된 정치철학적 난제 위에 서 있다.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제기한 '관용의 역설(paradox of tolerance)'이다. 무제한의 관용은 결국 관용 자체를 파괴한다. 관용을 무기로 삼아 불관용을 퍼뜨리는 세력에게까지 관용을 베풀면, 관용적인 사회는 그 불관용에 의해 무너진다. 따라서 포퍼는 역설적으로, 관용을 지키기 위해서는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 필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온라인 혐오·극우 범죄를 제도적으로 분명히 범죄화하고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관용의 역설을 한국적 맥락에서 변주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실제로 독일의 '인민선동죄(Volksverhetzung)'나 여러 민주주의 국가의 혐오표현 규제는,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보장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자기방어를 위해 선을 긋는다. '박멸해야 한다', '범죄화해야 한다'는 표현을 이런 자기방어 논리의 거친 압축으로 본다면, 그 안에는 변호 가능한 핵심이 있다.
그러나 포퍼 자신이 단 단서가 결정적이다. 그는 불관용을 억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적 설득이 불가능하고, 폭력으로 응수하는 세력에 한정되어야 하며, 그 수단 또한 합리적이고 절제된 것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관용의 역설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을 짓밟아도 좋다'는 면허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조심스럽게, 가장 좁게 적용되어야 하는 예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발언의 '내용'은 변호 가능하지만, 발언의 '언어'는 변호하기 어려워진다.



4. 은유의 무게 — 말은 어디까지 말인가
'탱크로 밀어버린다'는 것은 명백히 은유다. 누구도 최욱 씨가 실제 군사 작전을 주장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은유에 불과한 것에 왜 이토록 무게를 두는가?
조지 오웰은 〈정치와 영어〉에서, 진부하고 폭력적인 비유가 사고를 타락시킨다고 경고했다. 그의 통찰은 단순한 문장론이 아니다. 우리가 사람을 가리켜 '박멸한다', '밀어버린다'고 말하는 순간, 그 대상은 마음속에서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제거의 대상으로 옮겨 간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말했듯, 은유는 단지 표현이 아니라 사고의 구조 자체다. '박멸'은 해충에게, '탱크'는 적군에게 쓰는 말이다. 사람에게 그 단어를 쓰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인간의 범주 바깥으로 밀어낸다.
이것이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언어적 메커니즘이다. 르완다 학살 당시 라디오 방송이 투치족을 '바퀴벌레(inyenzi)'라 부른 것, 역사 속 수많은 폭력이 먼저 언어에서 상대를 벌레와 짐승으로 격하시키는 데서 시작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폭력은 손이 아니라 혀에서 먼저 일어난다.
그래서 '말은 그저 말일 뿐'이라는 항변은 절반만 맞다. 직접적인 선동과 단순한 은유 사이에는 분명히 법적·도덕적 차이가 있고, 표현의 자유는 거친 비유까지도 상당 부분 품어야 한다. 그러나 공적 영향력을 가진 화자—288만 구독자를 둔 방송의 진행자—가 특정 집단을 '박멸'과 '탱크'의 언어로 호명할 때, 그 은유는 사적인 농담의 무게로 측정되지 않는다. 영향력은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 한국적 비극의 층위가 하나 더 겹친다. 이 땅에서 '탱크'는 추상적 무력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1980년 5월, 시민을 향해 실제로 굴러간 기계의 이름이다. 그러니 '극우가 동경하는 전두환의 방식으로 그들을 밀어버리자'는 문장에는 견디기 어려운 자기모순이 있다. 국가폭력의 야만을 규탄하기 위해, 바로 그 국가폭력의 도구를 응징의 은유로 빌려 오는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자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던 니체의 경구가, 이보다 더 들어맞는 자리도 드물다.



5. 그래서 — 한 발 물러서서
이제 균형을 위해 양쪽 모두에게 정직한 질문을 던져 보자.
발언을 변호하는 쪽에게. 만약 같은 문장을 보수 성향 방송 진행자가 진보 진영 커뮤니티를 향해 말했다면, 당신은 '맥락'과 '범죄에 한정했다는 단서'를 똑같이 변호 사유로 받아들였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변호하는 것은 발언이 아니라 화자다.
발언을 단죄하는 쪽에게. 당신의 분노는 '탱크'라는 단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가, 아니면 이번 화자가 반대 진영이기에 비로소 작동했는가? 스타벅스 사안과 이번 사안에 당신이 들이댄 잣대가 달랐다면, 당신 역시 일관성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 논란에서 어느 정파가 더 옳은지를 판정할 생각이 없고, 그것은 이 글의 몫도 아니다. 다만 사안 너머에 남는 원칙 하나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의 적과 싸우는 일은 정당하지만, 그 싸움의 언어가 적의 언어를 닮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절반은 진 것이다. 혐오와 극우 범죄에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명제와, 그것을 '박멸'과 '탱크'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명제는 결코 같지 않다. 전자는 민주주의의 자기방어이고, 후자는 그 방어가 스스로를 배반하는 방식이다. 목적의 정당함이 수단의 거칢을 정화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것이 모든 정의로운 분노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남는 것은 더 작고 더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내가 응원하는 사람의 거친 말에,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들이댈 그 잣대를 똑같이 들이댈 수 있는가. 공론장의 품격은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바로 이 사소한 일관성의 누적으로 지어진다. 탱크라는 단어 하나가 며칠 동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어쩌면 최욱이라는 한 사람의 책임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이 일관성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기 — 사실관계에 관한 주의
- 발언 일자(6월 5일), 발언의 골자, "그 범죄에 대해서만큼은"이라는 한정 표현, 정준희 교수의 별도 발언, 이준석·나경원의 비판 등은 복수의 언론 보도에서 일관되게 확인된 사실에 근거했다.
- 발언이 5·18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최욱 씨 본인의 '탱크' 발언 관련 공식 입장·사과가 보도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은 특히 유의해 읽어 주기를 바란다.
- 따라서 본인의 해명이 추후 공개되면, 위 사실관계와 평가의 일부는 보강·수정될 여지가 있다.